수치심에 대해 바로 알기
오태균 교수 (총신대학교)
들어가는 말
당신에게 수치심하면 떠오르는 단어 혹은 이미지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부끄러움, 당황, 창피함, 얼굴이 붉어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 혹은 분노 등과 같은 단어들과 이미지들이 연상될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어렵게 도움을 청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당신은 당연히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이 감정은 누구나에게 존재하는 보편적인 정서이다. 또한 당신이 누군가에게 놀림, 조롱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면 당신은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물론 당신의 자존감에도 큰 손상을 입을 것이다. 일단 수치심에 사로잡히면 당혹감, 굴욕감, 치욕감, 불명예감 등과 같은 다양한 복합적 감정이 후폭풍처럼 따른다. 다른 사람이 모르길 원했던 정보, 혹은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는 사실이 드러나면 누구라도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낀다. 간혹 기업 내의 비리 문제로 검찰 조사를 받는 최고 경영인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바로 이 수치심의 문제이다. 그 뿐 아니라 대학 입시 실패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소년을 생각해 보라. 이렇듯 수치심을 인한 자살은 모든 연령대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수치심의 파괴적인 영향력을 제대로 인지하고 못한 채 순간의 감정으로 간주하고 넘겨 버린다는데 있다. 당신이 목회자라면 이 부분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해로운 수치심에 사로잡힌 성도가 교회에서 핵심적인 일꾼이라면 당신의 목회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소고에서는 수치심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심리상태를 지칭하는지, 수치심이 생래적 정서인지, 아니면 다양한 사회환경에서 얻어지는 학습 경험의 산물인지, 수치심의 유형과 동반되는 긍정적, 부정적 차원의 영향, 그리고 치료적 대안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수치심 상담 사례
사례: K양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이상 떨어진 한 지방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다. 그녀가 상담을 의뢰한 주된 호소는 자신의 성형 문제로 인한 아버지와의 갈등이다. 본인은 전면적인 얼굴 성형을 원하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극심한 반대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부녀관계가 대치와 갈등의 국면에 놓여 있었다. 상담 첫 회기에서 그녀에게 받은 첫 인상은 아담하고 귀여운 용모를 가진 평범한 여대생의 모습이다. 하지만 본인은 정작 자신의 용모에 대해서 대단히 불만스러워했으며, 상담을 하는 동안 그녀의 표정은 어둡고 무거워 보였다. 내담자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과과 수치심으로 인해, 학교에서 발표 수업이 있는 날이면 자신의 외모로 가지고 다른 학생들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수치이자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결국 그녀는 1년 전 가벼운 눈 성형 수술을 했고, 현재 코 성형 수술 비용 마련을 위해 주말에 열심히 편의점 등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모태 신앙인이 그녀가 주일 예배까지 못드리게 되자 아버지의 갈등과 대립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또한 주말에 일하는 것만으로는 수술비용 마련이 충분치 않기에 그녀는 부모 모르게 학자금 대출까지 신청하여 그것을 수술비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수치심의 정체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수치심이 개인의 핵심감정으로 사로 잡혀 있게 되면 본인 뿐 아니라 가족, 그리고 주변사람들과의 관계까지도 힘들어 진다. 수치심이란 내면의 부정적인 자아평가와 관련된 것으로 자신의 부족이나 결핍, 혹은 부적절함으로 인해 자신의 이상과 분리된 자아를 발견하게 될 때 자신이 가치없는 존재라는 자아의식에서 비롯된 고통스러운 감정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수치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직장과 군대와 같은 계급 사회에서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사람을, 교사라면 학생들을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곤혹스럽게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수치심을 전가시키는 행위이다.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수치심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초래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가 혹은 투사시키는 심리적 역동을 작동시킨다.
수치심과 드러남 (노출)과의 관계는 밀접하다. 수치심을 경험하면 우리는 종종 숨거나 회피하는 반응을 보인다. 수치심이란 영어 단어 shame운 ‘자기 자신을 덮는다’는 의미인 고대 독일어 skam에서 유래되었다. 수치심으로 자신을 숨기는 모습은 성경에서 좋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2:25)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본래 에덴동산에는 수치심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해로운 수치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을 때 그들은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을 때 그는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3:10)라고 대답했다. 신약에서는 수치심과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로 베드로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모든 사람이 다 버려도 자신은 주님을 결단코 버리지 않겠노라고 큰 소리를 치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정작 예수께서 대제장장 가야바 앞에 끌려 왔던 현장에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심지어는 그분을 저주하며 (마26:79) 모른다고 했다. 그 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눅22:61a)라고 누가는 그 장면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베드로 느꼈을 수치심에 대해 상상해보라. 그의 수치심은 어느 정도의 죄책감과 함께 왔을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과 수치심은 함께 오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구별된다. 죄책감은 내가 한 일, 행위 (what I did)에 대한 정서라면, 수치심은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떤 사람인가 (Who I am)에 대한 정서로 전인격적 모습과 관련되어 있다. 필자는 과거 사춘기의 아들이 말로 통제가 불가능하자 홧김에 심하게 매를 든 적이 있다. 그날 밤 청소년기에는 누구나 있을법한 아들의 반항에 대해 그 정도도 참고 넘어가지 못한 초라한 나의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심한 죄책감에 시달린 적이 있다. 이것은 내가 한 행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그런데 회초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다소 심하게 때린 부분에 대해서는 ‘나’라는 한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극도의 수치심으로 더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전자가 나의 한 행위에 대한 죄책감이라면, 후자는 바로 나의 모습 근간을 뒤흔드는 수치심이라고 할 수 있다.
수치심의 생성과 발달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수치심에 더 취약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보통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수치심으로 자주 고통을 느끼는데, 수치심은 이미 그의 내면 깊숙한 속에 내재화되어 자신을 형편없고 가치 없는 존재로 간주해 성인이 되어도 사회생활 전반에서 결정적인 순간 당신의 발목을 잡곤 한다. 이런 수치심은 어떻게 생성되었고 발달되는가?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에릭 에릭슨 (Eric Erickson)의 인간 발달 8단계에 의하면 이 수치심의 발달은 취학 전 아동기인 제2단계에 해당한다. 각 단계마다 발달과제가 있는데, 2단계는 자율성인데, 이것이 미발달 될 때 수치심 혹은 의심이 발달된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영아기 때 이미 전능감이 형성되어 자신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자신을 믿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이제 겨우 말하기 시작한 아이가 매사에 “내가~ 내가~”라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표현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부모가 이런 아이의 태도를 잘 받아주고 안내해주면 자율적인 아이로 성장하지만, 그의 견해가 부모에 의해 쉽게 묵살되면 수치심이 그의 정서를 지배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에릭슨은 본 것이다. 한국처럼 유교 문화권인 나라에서는 아이들의 견해가 존중되기 보다는 부모에 의해 통제되고 묵살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에게는 이 수치심이 크게 발달하는 모습을 보인다.
수치심이 발달되는 두 번째 요인은 한국 특유의 비교 문화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저명한 크리스천 작가인 필립 얀시 (Phillip Yancy)는 이 사회가 황폐화되어가는 원인을 3가지 즉, 경쟁위주의 사회, 무정한 부모, 그리고 은혜보다 율법의 앞서는 사회라는 점을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서구뿐만 아니라 한국 상황에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그가 말한 이 3가지 요소 모두가 사람들에게 파괴적인 해로운 수치심을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가정에서 부모에 의해 다른 아이들에게 비교 당하는 아이는 수치심의 노예로 성장하기 쉽다. 학교에 가도 반 친구가 곧 내 학업 성적의 경쟁자이기 때문에 일부 우수한 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하고 다수의 학생들은 스스로를 실패자, 혹은 낙오자로 규정하면서 수치심에 사로잡힌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경쟁적인 사회에 나가면 더욱 증폭되기 마련이다. 결국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성장한 이들은 그들 마음의 내면에서 “다른 인간과 비교하여 자신을 인간으로써 불합격품이며 못하고 열등한 면이 많은 존재”라는 내면의 소리에 세뇌 당한다.
수치심이 발달하는 세 번째 요인은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 하는 동야 특유의 문화에 있다. 문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Ruth Benedict)는 1944년 6월 미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1946년에 출간한 그녀의 저서 국화와 칼 에서 미국의 문화와 일본의 문화를 비교하였다. 결혼한 일본 남자는 어머니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의 필요를 종종 포기하는 모습을, 반면에 미국에서는 학급 동료에게 친절을 경험한 학생이 그것을 어떻게 보답할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는 각각 문화의 독특성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런 유사한 사례를 중심으로 미국의 문화를 죄의식의 문화로, 일본의 문화를 수치심 (체면)의 문화로 평가하였다. 사실 이런 수치심의 문화는 한국, 중국, 일본과 같은 동양 문화권에서는 보편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개인보다 우선시 하는 공동체 중심 문화인 동양에서는 수치심을 단순한 하나의 감정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본성의 하나로 이해하였다. 맹자는 일찍이 수치심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인간에게 수치심 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이 수치심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로 보았다. 그는 수오지심 (羞惡之心)이라고 하여, 수치심과 증오심의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성찰해야 함을 강조하였다.